의령 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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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의령 여씨는 백제의 왕족 부여씨에서 기원하며, 고려 시대에 여선재가 고려에 귀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문과, 무과, 생원시, 진사시에 많은 급제자를 냈다. 주요 인물로는 여선재, 여중부, 여흥렬, 여효온 등이 있으며, 현대에는 여상규, 여영국 등이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이 집성촌이며, 2015년 대한민국 인구는 17,780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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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 여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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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의령 여씨 |
한자 표기 | 宜寧 余氏 |
유형 | 씨족 |
국가 | 한국 |
지역 | 의령군 |
창시자 | 여선재(余善才) |
관련 인물 | 여효진 여민지 |
웹사이트 | 의령 여씨 대종회 |
역사 | |
시조 | 여선재(余善才) |
중시조 | 여현경(余玄景) |
관향 | 경상남도 의령군 |
인구 정보 | |
2015년 인구 | 17,780명 |
집성촌 | |
집성촌 |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여효온, 여상규, 여경엽, 여방오, 여인국, 여현호, 여영국, 여명숙, 여태천, 여효진, 여도은, 여민지, 여근우 여세규, 여호규 |
2. 기원
여(余)씨는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에서 기원한다.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에서 기원한다.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가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고, 1103년(숙종 8) 고려에 환국하여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을 1세로 한다.[1]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는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붙잡혀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고 한다.[8]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함께 살고 있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8]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가 고려 때 귀국하였다고 전한다.[8]
3. 역사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피납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군거하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 합류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가 고려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8]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余善才)가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고, 1103년(숙종 8) 고려에 환국하였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는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한다.
3세 직유(稷蕤)가 검교장군(檢校將軍)이 되었고, 9세 중부(仲富)가 고려 말에 호부전서를 거쳐 조선에서 호조판서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10세 여흥렬(余興烈)이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1세 원경(元暻)이 숙천(肅川)목사 ·안주진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12세 건(健)이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효제(孝悌)가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다.
4. 인물
3세 여직유(余稷蕤)가 검교장군(檢校將軍)이 되었고, 9세 여중부(余仲富)가 고려 말에 호부전서를 거쳐 조선에서 호조판서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10세 여흥렬(余興烈)이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고, 11세 여원경(余元暻)이 숙천(肅川)목사 ·안주진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12세 여건(余健)이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여효제(余孝悌)가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다.[1]
4. 1. 고려
4. 2. 조선
4. 3. 현대
5. 과거 급제자
의령 여씨는 조선시대 문과, 무과, 생원시, 진사시 등에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5. 1. 문과
이름 |
---|
여상규 |
여효온 |
여후 |
5. 2. 무과
이름 |
---|
여문규 |
여봉길 |
여상진 |
여심 |
여인길 |
여흥경 |
여춘 |
5. 3. 생원시
여계복, 여극, 여상규, 여진, 여하진 등이 있다.5. 4. 진사시
합격자 |
---|
여광필 |
여동삼 |
6. 항렬자
29세 | 30세 | 31세 | 32세 | 33세 | 34세 | 35세 | 36세 | 37세 | 38세 | 39세 | 40세 | 41세 | 42세 |
---|---|---|---|---|---|---|---|---|---|---|---|---|---|
엽(燁) | 규(奎) | 호(鎬) | 태(泰) | 모(模) | 찬(燦) | 기(基) | 현(鉉) | 원(源) | 동(東) | 환(煥) | 효(孝) | 종(種) | 한(漢) |
7. 집성촌
경상남도 하동군은 의령 여씨의 집성촌이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는 의령 여씨가 하동 지역의 세력 가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연산군 때 여승탁(余承鐸)이 의령에서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로 옮겨 왔다. 1750년(영조 26) 무렵 여승탁의 후손이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에 들어와 터를 잡으면서 의령 여씨의 대표적인 세거지가 되었다.[7]
하동군 하동읍 화심마을 양심재(養心齋)는 의령 여씨들이 입향조를 받들고 후손들을 깨우치기 위해 건립한, 학숙소를 겸한 재실이다. 최익현은 양심재에 들렀다가 〈양심재염심자(養心齋拈心字)〉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화심마을에는 만석꾼으로 알려진 참봉 여종엽(余宗燁)이 살았던 집터와 잔존 건물이 남아 전한다.[7]
8. 문화재
의령 여씨 향제시도록
9. 인구
연도 | 인구 |
---|---|
2000년 | 16,477명 |
2015년 | 17,780명 |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의령여씨 宜寧余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null
[2]
텍스트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2
[4]
웹사이트
한성백제 왕족의 후손을 찾습니다
https://www.asiae.co[...]
2014-03-07
[5]
웹사이트
宜寧余氏淵源 (의령여씨연원)
http://www.의령여씨대종회.c[...]
宜寧余氏大宗会
2022-08-15
[6]
웹사이트
항렬자
http://www.의령여씨대종회.c[...]
宜寧余氏大宗会
2022-08-15
[7]
웹사이트
여씨(余氏) 본관(本貫) 의령(宜寧)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8]
뉴스
의령여씨 대종회, 시조공 추향봉제 및 정기총회
http://uiryung.newsk[...]
의령신문
201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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