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의령 여씨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의령 여씨는 백제의 왕족 부여씨에서 기원하며, 고려 시대에 여선재가 고려에 귀화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으며, 특히 조선 시대에는 문과, 무과, 생원시, 진사시에 많은 급제자를 냈다. 주요 인물로는 여선재, 여중부, 여흥렬, 여효온 등이 있으며, 현대에는 여상규, 여영국 등이 있다. 경상남도 하동군이 집성촌이며, 2015년 대한민국 인구는 17,780명이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의령 여씨 - 여영국
    여영국은 1965년 경상남도 사천 출생으로 노동 운동과 정치 활동을 거쳐 정의당 대표를 역임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여러 저서를 출판했다.
  • 의령 여씨 - 여상규
    여상규는 서울대 법대 수석 졸업 후 판사, 변호사를 거쳐 3선 국회의원과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역임하며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펼쳤으나, 간첩 조작 사건 관련 논란 등에 휩싸였고 현재는 대한민국헌정회 사무총장으로 재임 중인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다.
의령 여씨
기본 정보
이름의령 여씨
한자 표기宜寧 余氏
유형씨족
국가한국
지역의령군
창시자여선재(余善才)
관련 인물여효진
여민지
웹사이트의령 여씨 대종회
역사
시조여선재(余善才)
중시조여현경(余玄景)
관향경상남도 의령군
인구 정보
2015년 인구17,780명
집성촌
집성촌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
관련 인물
관련 인물여효온, 여상규, 여경엽, 여방오, 여인국, 여현호, 여영국, 여명숙, 여태천, 여효진, 여도은, 여민지, 여근우 여세규, 여호규

2. 기원

여(余)씨는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에서 기원한다.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는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따르면,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붙잡혀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고 한다.[8]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함께 살고 있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8]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고려 때 귀국하였다고 전한다.[8]

3. 역사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에서 기원한다.

중국 《수서(隨書)》, 《송서(宋書)》와 《일본서기》 백제복국군 편에 백제 의자왕의 왕자를 여풍장(余豊璋), 왕숙을 여충신(余忠信), 정승을 여의수(余宜受)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백제본기〉와 《송서》〈백제전〉, 《일본서기》 등에 백제가 나·당 연합군에게 패망한 후 왕후장상 1만 2천여 명이 당나라 장수 소정방에게 피납되어 당나라 수도 장안에 백제촌(百濟村)을 이루어 살았고, 일본에 있던 왕자 여풍장은 복국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복흥군과 함께 고구려로 피신하였다는 기록과 그 뒤 부왕(父王)이 왕족 일행과 군거하는 당나라의 백제촌(百濟村)으로 잠입 합류하여 후일을 기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의령 여씨 문중에 따르면, 백제 왕자 여풍장의 후손 여선재고려 때 환국하였다고 전한다.[8]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余善才)가 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고, 1103년(숙종 8) 고려에 환국하였으며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余英候) 이후의 세계는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余玄景)을 1세로 한다.

3세 직유(稷蕤)가 검교장군(檢校將軍)이 되었고, 9세 중부(仲富)가 고려 말에 호부전서를 거쳐 조선에서 호조판서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10세 여흥렬(余興烈)이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내고, 11세 원경(元暻)이 숙천(肅川)목사 ·안주진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12세 건(健)이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효제(孝悌)가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다.

4. 인물

백제 의자왕의 후손인 여선재송나라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올랐고, 1103년(숙종 8) 고려에 환국하여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여선재의 아들 여영후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때 문과에 급제한 여현경을 1세로 한다.[1]

3세 여직유(余稷蕤)가 검교장군(檢校將軍)이 되었고, 9세 여중부(余仲富)가 고려 말에 호부전서를 거쳐 조선에서 호조판서가 추증되었다고 한다. 10세 여흥렬(余興烈)이 조선 태종 때 무과에 급제하여 황해도수군절도사를 지냈고, 11세 여원경(余元暻)이 숙천(肅川)목사 ·안주진병마절도사를 지냈다고 한다. 12세 여건(余健)이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며, 여효제(余孝悌)가 효자로 정문이 세워졌다.[1]

4. 1. 고려


  • 여직유(余稷萊) : 고려 때 검교장군(檢校將軍)을 지냈다.
  • 여정(余廷) : 고려 때 군기감(軍器監)을 지냈다.
  • 여중엄(余仲淹) : 고려 때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예부전서(禮部典書)를 역임하였다.
  • 여중부(余仲富) : 고려 때 호부전서(戶部典書)를 지냈다.

4. 2. 조선


  • 여흥렬(余興烈) : 여중부(余仲富)의 아들이다. 조선 태종 때 황해도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1]
  • 여성렬(余成烈) :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안주진(安州鎭)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1]
  • 여원경(余元暻) : 여성렬(余成烈)의 아들로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1]
  • 여건(余健, 1457년 ~ 1517년) : 증 호조판서 중부의 증손이고 절도사 원경의 아들이다. 이조정랑, 승지, 강원도 관찰사(觀察使)를 역임했다.[1]
  • 여덕윤(余德潤) : 예부전서(禮部典書) 중암(仲庵)의 아들이다. 세종 때 선산부사 보공장군(保功將軍)을 지내고 용궁현에 살았다. 그의 아들 여효온(孝溫), 여효량(孝良), 여효공(孝恭), 여효검(孝儉) 5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자 5형제를 일러 오룡(五龍)이라 하였고, 이는 영순면 오룡리의 동리 명칭이 되었다.[1]
  • 여효온(余孝溫) : 여덕윤의 아들. 1434년(세종 16년)에 알성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지내고, 의금부 지사(義禁府知事)가 되었다.[1]
  • 여범(1478년 ~ 1539년) : 관찰사 건의 아들로 중종 때 충순위 어모장군을 지냈다.[1]
  • 여균(1480년 ~ ?) : 관찰사 건의 아들이다. 중종 때 충주목사를 역임했다.[1]
  • 여수원(1498년 ~ ?) : 목사 균의 아들로 장사랑을 지냈다.[1]
  • 여춘(余春, 1554년 ~ ) : 임진왜란 때 문경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병조참의를 역임했다.[1]
  • 여명장(1561년 ~ ?) : 관찰사 건의 증손으로 종사랑이 되었다.[1]
  • 여봉손(1525년 ~ 1579년) : 자는 종백, 관찰사 건(健)의 증손이고 직장 소(訴)의 아들이다. 정로위 어모장군을 지냈다.[1]
  • 여광수(余光壽, 1544년 ~ 1608년) : 흥수(興壽)라고도 했다. 봉손(鳳孫)의 아들이다. 어릴 때 사서삼경과 백가의 시서(詩書)를 통독하였고 장년(壯年)에 입영하여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냈다.[1]
  • 여흥경(余興慶, 1547년 ~ 1616년) : 어모장군(禦侮將軍) 여봉손(余鳳遜)의 아들. 1594년(선조 27년) 별시 무과에 급제하여 직장을 거쳐 군자감 주부(主簿)를 지냈다.[1]
  • 여상규(余尙珪, 1595년 ~ ?) : 참봉(參奉) 여우정(余友靖)의 아들. 1618년(광해군 10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7년(인조 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을 지냈다.[1]
  • 여후(余垕, 1677년 ~ ?) : 1705년(숙종 31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1724년(경종 4년) 봉상시첨정(奉常寺僉正)에 이르렀고, 1732년(영조 8년) 강진현령(康津縣監)을 역임하였다.[1]

4. 3. 현대


  • 여상규(余尙奎, 1948년 ~ ) : 판사 출신으로, 제18대, 19대, 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 여인국(余仁國, 1955년 ~ ) : 제9, 10, 11대 경기도 과천시장을 역임하였다.
  • 여세주(余世奎, 1956년 ~ ) : 경주대학교 교수이다.
  • 여현호(余峴鎬, 1962년 ~ ) : 대통령비서실 국정홍보비서관을 역임하였다.
  • 여영국(余永國, 1964년 ~ ) :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제20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정의당 대표를 역임하였다.
  • 여명숙(余明淑, 1966년 ~ ) : 포항공과대학교 창의IT융합공학과 교수이며, 제2대 게임물관리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 여호규( ) : 한국외국어대학교 교수(인문대학장)이다.

5. 과거 급제자

의령 여씨는 조선시대 문과, 무과, 생원시, 진사시 등에서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의령 여씨 과거 급제자
종류합격자
문과여상규, 여효온, 여후
무과여문규, 여봉길, 여상진, 여심, 여인길, 여흥경, 여춘
생원시여계복, 여극, 여상규, 여진, 여하진
진사시여광필, 여동삼


5. 1. 문과

이름
여상규
여효온
여후


5. 2. 무과

이름
여문규
여봉길
여상진
여심
여인길
여흥경
여춘


5. 3. 생원시

여계복, 여극, 여상규, 여진, 여하진 등이 있다.

5. 4. 진사시

합격자
여광필
여동삼


6. 항렬자

29세30세31세32세33세34세35세36세37세38세39세40세41세42세
엽(燁)규(奎)호(鎬)태(泰)모(模)찬(燦)기(基)현(鉉)원(源)동(東)환(煥)효(孝)종(種)한(漢)

[6]

7. 집성촌

경상남도 하동군은 의령 여씨의 집성촌이다. 18세기 중엽의 '여지도서'에는 의령 여씨가 하동 지역의 세력 가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 연산군 때 여승탁(余承鐸)이 의령에서 하동군 양보면 박달리로 옮겨 왔다. 1750년(영조 26) 무렵 여승탁의 후손이 경상남도 하동군 하동읍 화심리에 들어와 터를 잡으면서 의령 여씨의 대표적인 세거지가 되었다.[7]

하동군 하동읍 화심마을 양심재(養心齋)는 의령 여씨들이 입향조를 받들고 후손들을 깨우치기 위해 건립한, 학숙소를 겸한 재실이다. 최익현은 양심재에 들렀다가 〈양심재염심자(養心齋拈心字)〉라는 시를 남기기도 했다. 화심마을에는 만석꾼으로 알려진 참봉 여종엽(余宗燁)이 살았던 집터와 잔존 건물이 남아 전한다.[7]

8. 문화재

의령 여씨 향제시도록

9. 인구

연도인구
2000년16,477명
2015년17,780명


참조

[1] 서적 Academy of Korean Studies 의령여씨 宜寧余氏 http://terms.naver.c[...] Academy of Korean Studies null
[2] 텍스트
[3] 웹사이트 KOSIS https://kosis.kr/sta[...] 2022-11-22
[4] 웹사이트 한성백제 왕족의 후손을 찾습니다 https://www.asiae.co[...] 2014-03-07
[5] 웹사이트 宜寧余氏淵源 (의령여씨연원) http://www.의령여씨대종회.c[...] 宜寧余氏大宗会 2022-08-15
[6] 웹사이트 항렬자 http://www.의령여씨대종회.c[...] 宜寧余氏大宗会 2022-08-15
[7] 웹사이트 여씨(余氏) 본관(本貫) 의령(宜寧)입니다. http://www.findroot.[...] 2022-07-27
[8] 뉴스 의령여씨 대종회, 시조공 추향봉제 및 정기총회 http://uiryung.newsk[...] 의령신문 2011-11-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